인과관계
2년 넘게 함께 일해온 로컬리제이션 담당자가 팀을 이동하게 되어 후임자를 뽑을 때까지 임시로 우리 팀을 지원해줄 예정인 A와 서로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다. A의 싹싹한 태도와 조리 있는 말솜씨에 꽤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일은 딱 부러지게 하지만 무뚝뚝하고 약간 엉뚱한 면이 있었던 전임자와 다른 스타일로 이쪽이 개인적으로 더 잘 통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거기서 끝났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겠지. 물론 약간의 반전이 있었다.
서로 소개를 마치고 내가 현재 진행중인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배경을 설명하고 어떤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할지를 이야기하면서 예시로 제품팀과 로컬리제이션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핑퐁 중인 기술적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이처럼 기술적 문제가 있을 때 사내에서 사용하는 티켓 시스템을 통해 티켓을 보내 컨설팅을 요청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A가 전임자와 달리 본인은 기술적인 배경이 없어서 티켓이 배정되면 확인이 늦을지도 모르니 티켓을 보낼 때 이메일로 따로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응? 기술적인 배경이 없어서 직접 조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라면 알겠는데 기술적인 배경이 없는 거랑 티켓 확인이 늦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전사적으로 사용하는 티켓 시스템이고 직관적인 디자인이라 사용하는데 대단한 기술적인 배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몇 주 쓰다 보면 익숙해질 만한 시스템이다. 나도 티켓 시스템보다는 메일로 받을 때 회신이 빠른 편이라 아마 A가 말하고자 한 건 본인에게 어떤 채널로 연락할 때 더 효과적인지일 거라고 이해는 했는데 앞뒤가 안 맞아서 의도가 뭔지 잠깐 생각해야 했다.
회의에 함께 참석한 팀 동료가 전임자와 논의해왔던 프로세스 개선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 실마리는 잡았지만 실제 대책까지는 연결되지 않은 상태라서 앞으로도 협조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A가 그렇게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자기가 사실은 내성적이라며 로컬리제이션 측의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응?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필요한 게 있으면 당연히 협조 요청할 건데 내성적인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내성적이든 외향적이든 상관 없는데. 아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프로세싱을 거친 후 아마 A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임시 담당자로서 적극적으로 개선 제안을 해나가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제품팀 쪽에서 적극적으로 제안해오면 지원하겠다는 것일 거라고 이해했다.
앞으로 함께 일할 사이에 서로의 일하는 방식과 제약 사항을 이해하고 서로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거나 불필요하게 부딪힐 일이 없도록 사전에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A가 먼저 자신의 방식에 대해 소개하고 기대치를 조정하려고 한 건 좋았다. 다만 전제랑 결론의 관계가 미묘해서 표면적으로만 보면 기술적 배경이 없고 내성적이라 일을 못 하겠다는 것 내지는 본인 몫을 남에게 넘기는 것으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기술적 배경이 없고 내성적인 사람으로서 이런 설명 방식에는 저항감이 든다. 기술적 배경이 없어도 얼마든지 사내 티켓 시스템 정도는 쓸 수 있고, 내성적이어도 얼마든지 발의해서 논의를 주도할 수 있다. 일이니까. 그래서 월급 받는 거잖아.
A의 첫인상은 결국 살짝 미묘한 것이 되어버렸다. 앞뒤가 맞게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긍정적인 포지셔닝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