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넛버터 프렌즈
아침에 일어나니 페덱스에서 오늘 중으로 배송 예정이라는 알림 문자가 와있다. 뭐지? 주문한 거 없는데. 아! E가 보냈다는 소포인가 보다.
E는 같은 팀에서 2년 넘게 함께 일한 또래 UX 디자이너로 일할 때 손발이 잘 맞는 편이어서 호감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같이 시애틀 출장을 갔을 때 먹거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E가 개발한 유기농 카페 DERU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였다. '유기농 카페'라니 너무 트렌디하게 들려서 포인트가 '유기농'에 있고 맛은 별로인 거 아냐하고 약간은 회의적인 마음으로 따라갔는데 이게 웬걸, 시애틀 지역에서 수확된 유기농 제철 재료로 만든 요리 정말 맛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후식으로 먹은 땅콩버터 케이크가 최고였다. 촉촉하고 무겁지 않은 다크 초콜릿 스펀지에 층층이 넉넉하게 발린 고소한 땅콩버터 크림이 절묘한 아메리칸 사이즈의 듬직한 케이크 한 조각을 나눠먹으면서 우리는 땅콩버터를 사랑하는 식성만이 아니라 사고방식, 관심사나 고민거리 등등 통하는 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E는 회사 동료를 넘어 친구가 되었고, 나는 E가 추천하는 먹거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주말에 같이 샌프란 시내에서 브런치를 즐기거나 공원에서 피크닉도 하고 카페에 앉아서 인생 설계처럼 꽤 진지한 이야기를 종이에 펜으로 써가면서 나눌 정도로 밀도 있는 사이가 되었는데 E가 작년 말에 동부에 사는 학창 시절부터 사귀어온 남자 친구와의 원거리 연애에 종지부를 찍으려 팀을 떠나 동부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래도 샌프란으로 곧잘 출장 올 예정이라고 해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1년 가까이 만나지를 못했다.
지난주에 E가 주소를 물어보길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려는 건가 싶어 알려주고 나도 E의 주소를 받았었다. E에게 카드를 쓰려고 각 잡고 앉았다가 카드만이 아니라 지난달에 남자 친구 부모님 그리고 본인의 여동생 이렇게 세 명의 하객 앞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지난주에 신혼집 마련을 해서 남자 친구 부모님 댁에서 이사 나온 E에게 이참에 결혼 선물을 해야겠다 싶어 디자인이 예뻐서 위시리스트에 담아두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던 티컵 소서 세트를 부부가 함께 로맨틱한 티타임을 즐기라고 사서 보냈다. 잘 받았나 연락해봤더니 배달하시는 분이 집 앞에 조용히 놓고 가서 새집 정리하느라 집에만 있던 E가 미처 모르고 있다가 내 문자에 소포를 발견하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그때 E가 실은 자기도 나에게 소포를 보냈다고 하는 거다. 'It's something edible from our fav company.'라고 하길래 연말연시를 홀로 보내는 나의 위장을 걱정해준 E에게 감동받았고, 이 부부가 좋아하는 회사의 음식은 어떤 건지 궁금해졌다.
오후에 드디어 택배가 왔다. 상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퍼펙트 바. DERU에서의 저녁식사로 나도 땅콩버터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된 E가 나에게 바로 전도한 프로틴 바다. 너무 달거나 맛이 없거나 해서 프로틴바/에너지바 류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에게 퍼펙트 바는 신세계였다. 건강하게 맛있는 맛, 꾸덕한 견과류 버터 덕에 속도 든든하다. 시애틀 출장 시기가 겹칠 때마다 같이 퍼펙트 바와 콤부차를 사러 홀푸즈에 들르곤 했었다. 'our fav company'의 '우리'가 남편이랑 자기가 아니라 나랑 자기였구나! 퍼펙트 바는 종류가 다양한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크 초콜릿 칩 피넛버터 맛을 기억하고 그걸로 한 상자, 그리고 피넛버터컵 초콜릿까지 함께 보내왔다.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고 행복하다. 고마워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