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너도 한 번 당해봐라'하고 서로 반대편에 서는 날이 오는 걸 손꼽아 기다리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누군가가 내 심정이 어땠을지 경험하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때가 왔다.
우리 매니저의 동료인 시니어 프로그램 매니저 A는 내가 우리 팀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고, 직력으로 따지면 내 2배 이상은 될 베테랑이다. 내가 좋은 첫인상을 남기는데 실패해서 그런 것인지 이 사람 스타일이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팀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약간 미흡한 부분이 있었던 내 업무 처리에 대해 A가 내게 개인적으로 피드백을 주기보다는 바로 참조에 당시 내 매니저였던 왕보스를 추가해서 비난조로 따지고 든 적이 있어서 A는 성공적으로 내게 나쁜 인상을 남겼다. 그 후로 직접 같이 일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두어 번 이메일로 다시 부딪히면서 A가 남의 이메일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이야기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거나 상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거나 개인 이메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굳이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걸 직접 경험했다. 처음에는 '나'의 문제인가 했는데 이 사람이 나한테만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걸 관찰하게 되어 나만 미움받는 건 아닌가 하는 불필요한 번뇌는 없어졌지만 A에 대한 껄끄러움은 여전히 남았다. 작년 12월부터 A와 업무 상 좀 더 가깝게 엮이게 되어 이메일을 주고받을 일이 더 잦아졌는데 그새 내가 좀 크긴 컸는지 A가 이건 이래야 한다라는 자기만의 생각으로 내 업무 분야에 대해 따지고 들거나 하면 이건 이런저런 이유로 이래야 하는 게 아니라 저래야 한다라고 받아칠 정도의 깡은 생겼다. 그러던 중 내가 진행하는 리뷰 회의의 본인 제품 관련 세션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걸 넘어서서 본인이 직접 진행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굳이 싸워서 사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원하는 대로 하라고 세션 진행 권한을 넘겼더랬다. 그래도 전체 총괄은 내가 해야 하니까 A가 본인 세션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모니터링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내게 감 놔라 배놔라했던 것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허술하게 관리하는 거다. 공휴일인 다음 주 월요일 지나고 당장 화요일부터 세션이 시작되는데 목요일까지도 본인 세션 발표자들에게 일정 확인은 물론 발표가 가능한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발표자가 참석 확인을 했냐고 물어보니 그제야 연락을 했다. 그래도 시니어 프로그램 매니저 짬빱이 있어서 뒤늦은 연락이나마 전달은 제대로 했더라. 문제는 이메일을 보내만 놓고 회신이 없는데 방치 플레이. 오늘은 금요일이고 오늘이 지나면 3연휴라고! 아침에 내가 다시 물어보니 그제야 이메일 팔로우업을 시작했다. 그래도 회신이 없는 사람이 있어서 이건 따로 이야기하겠거니 하고 내버려 두고 내 업무로 돌아갔다. 5시 반쯤 이번 주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회신을 다 받았는지 확인해 봤는데 아차, 한 사람이 남았다. 심지어 A는 이미 오프라인. 결국 채팅으로 내가 최종 확인을 하겠다고 메시지를 남겨두고, 마지막 한 사람과 따로 이야기해서 최종 확인을 받았다. 클리어했다고 메시지를 보내니 그제야 A에게서 답이 왔다. '잘 됐네'라고. 그리고 그새 새로 찾은 소소한 지적 거리를 나에게 전달한다. 이봐요, '고마워'는 어딨어?
어제오늘 A에게 지적질(물론 짬밥이 다르기 때문에 공공연한 본격 지적질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이건 어떻게 되었나요? 저건 어떻게 되었나요?'하는 완곡한 지적질)을 하면서 자기는 잘못하는 거 하나도 없는 것 같은 태도로 세상에 지적질을 해온 A가 과연 내게 쪼임을 받으면서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었다. A의 답변을 받고 나니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이번 주 점심 명상 수업의 명언 '사람은 다 다를 수밖에 없어'를 명상하는 금요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