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생활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퇴근토끼 2020. 9. 18. 15:28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고구마 같은 상황이 많지만, 요즘 특히 답답하게 느껴지는 상황은 사람들이 뭔가 할 때 자기가 왜 그걸 하고 있는지, 조직에서 왜 그걸 요구하는지를 모르고 해서 영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다.

 

이번 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오늘은 내가 담당하는 제품 A 플랫폼 상의 애플리케이션 중 하나인 제품 B의 월간 비즈니스 리뷰가 있는 날이었다. 매달 이 회의에서 제품 B 고객지원팀이 사용자 동향을 발표하는데 나는 제품 B의 플랫폼인 제품 A 담당자로서 제품 B 고객지원팀의 일종의 어드바이저로 참가하면서 제품 B 고객지원팀의 보고서 준비를 돕거나 회의에서 코멘트하거나 한다. 오늘 회의를 위해 제품 B 고객지원팀에서 주초에 보내온 보고서 초안을 리뷰했는데 최근 출시한 새 버전에 대한 사용자 피드백 분석에 ‘프라이버시 관련 우려가 있음'이라는 꽤 강력한 문구가 들어있었다. 사용자 프라이버시 보호는 전사적으로 최우선시하는 사항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건 꽤 심각한 문제다. 보고서에 근거로 제시된 사용자 피드백 링크 두 개를 얼른 열어서 코멘트를 읽어 내려갔다. 둘 다 트윗인데 하나는 원 트윗에 줄줄이 수십 개의 코멘트가 달려있었다. 원 트윗에는 프라이버시 관련한 내용이 전혀 없다. 줄줄이 달린 코멘트를 훑어내려 가는데 딱 한 명이 이걸 쓰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정보를 다 추적하고 있겠지라는 요지의 냉소적인 코멘트를 했다. 두 번째 트윗은 이 제품에 대해 듣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우리 회사 제품이라는 걸 알고 짜게 식었다는 요지의 코멘트이고 댓글도 없다. 응? 응? 응? 첫 번째 링크는 일단 관련된 코멘트는 있으니 그렇다 쳐도, 두 번째 링크는 왜 우리 회사 제품이라서 짜게 식었는지 그게 프라이버시 관련 문제인지 품질이나 브랜드 관련 문제인지 아니면 덮어놓고 우리 회사가 싫은 건지 나는 독심술사가 아니라서 알 수가 없는데, 비약이 너무 심하다. 그래서 보고서 작성자에게 일단 프라이버시 관련 우려는 제품팀에 있어 심각한 문제이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데 근거가 빈약한 것 같다고, 첫 번째 링크는 원 트윗을 링크해봐야 사람들이 관련 댓글을 찾기 어려우니 관련 댓글을 직접 링크할 것, 두 번째 링크는 이게 어떻게 프라이버시와 연결이 되는지 불분명하니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리고 추가 근거가 없다면 이 분석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그러자 다음 날 돌아온 답변은 링크를 제대로 열어는 봤냐 너랑 나랑 다른 게 보이냐 이런 식이다. 내가 묻고 싶다. 너랑 나랑 다른 게 보이냐? 스크린샷을 찍어서 난 이게 보인다라고 보냈다. 그러자 돌아온 답변은 같은 거 보이는 거 맞다고, 첫 번째 링크는 내가 제안한 대로 관련 댓글 직 링크로 변경했고, 자기 생각에는 이건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에 약간 문면을 수정했지만 그대로 가겠단다. 그게 어제 있었던 일. 더 이상 피드백을 해도 먹힐 것 같지도 않고, 결국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보고서 작성자 본인이니 더 싸우지 않고 본인이 직접 당해보게 그대로 뒀다. 그리고 맞이한 오늘의 회의. 보고서 작성자가 보고서의 해당 부분 분석을 다 읽기도 전에 사람들이 난리다. 얼마나 심각한 건지 제품의 어떤 기능이 프라이버시 관련 우려를 낳은 건지 아우성. 높으신 분이 보고서의 근거 링크를 클릭해보고, 아니나 다를까 이 코멘트는 우리 제품이랑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라고... 내가 뭐랬어!!! (I told you so)라고 말하는 상황을 나는 즐기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닥치지를 않기를 바라서 내 일도 바빠 죽겠는데 내 시간 할애해서 리뷰하고 의견 줬잖아. 결국 보고서 작성자가 프라이버시 우려에 대해 더 논의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 업데이트하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끝났다.

 

내 생각에 이 친구의 실패의 원인은 이 보고서의 목적이 뭔지, 제품팀에서 알고자 하는 것이 뭔지를 모르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럴듯해보이는 분석으로 있어 보이는(?)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한 것에 있다. 프라이버시 관련 코멘트를 제외하고는 전체 보고서의 내용이 심심했는데 그건 아직 새 버전 사용자 수가 적고, 따라서 절대적인 코멘트 수가 적고, 결과적으로 제품팀에게 의미가 있는 코멘트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제품팀에 의미가 있는 코멘트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제품팀의 목적은 좋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고, 사용자 만족을 얻고, 사용자 저변을 넓히고, 그에 따라 수익을 창출하는 등등에 있다. 그래서 제품팀은 사용자가 제품의 어떤 부분을 만족스러워하는지 혹은 어떤 부분에 불만이 있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디자인 변경을 고려하는 게 좋을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고쳐야 하는 부분이 있는지 등등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 그런 정보가 해당 보고 기간 동안 수집되지 않았다면 그걸 있는 그대로 아직은 정보가 부족하다 더 두고 봐야겠다고 하면 되는데 단 두 개의 코멘트에서 센세이셔널한 정보를 창출해냈다. 대체 왜? 그게 누구한테 득이 되는 건데? 잘못된 정보로 혼란을 일으키는 건 오히려 해가 된다고. 그리고 그건 너의 평판에도 해가 된다고.

 

회의가 끝나고 나도 포함되어 있는 제품 B 고객지원팀 그룹 채팅방에서 회의에 참석했던 그 팀의 다른 팀원들이 보고서 작성자에게 발표 잘했다며 칭찬 릴레이었다. 대체 어디가? 고생했다 정도면 몰라도. 이런 식의 입 발린 피드백은 내가 보기에는 무의미하다. 달래주려고 한 건가? 보고서 작성자가 팀원들의 칭찬 릴레이에 마음이 좀 편해졌을지, 아니면 ‘퇴근토끼 이 자식 지금 고소해하고 있는 거 아니야'라고 분하게 생각하고 있을지, 아니면 ‘퇴근토끼 말 듣을걸’하고 후회하고 있을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을지 나는 모른다. 다만 본인을 위해서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우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 때는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창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발표를 마지막으로 새 팀원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이 프로젝트를 떠나는 사람이니까, 앞으로의 일을 나는 알 길이 없겠지. 혹시 그래서 아무래도 좋고 마지막에 마음대로 하고 싶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