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자답

Q16. 1년 전, 지금, 1년 후?

퇴근토끼 2020. 7. 24. 16:12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소방수 모드로 모 높으신 분이 뜬금없이 지핀 불부터 끄고 시작한 데다 (까라면 까야지 월급쟁이의 비애) 친구들이 경악할만한 선언을 해와서 (내일모레 입원하고 수술해야하는 녀석이 갑자기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 입양 신청했다지를 않나, 그리로 가봤자 문제의 본질은 안 바뀌고 똑같은 문제를 다른 놈들이랑 해결해야 하니 옮기지 말라고 만류했던 팀에 옮기겠다고 하지를 않나) 하루 종일 정신 에너지 소모가 컸다. 나도 진짜 마인드 마이 오운 비즈니스 해야 하는데 오지랖 하고는. 어쨌든 지금은 글쓰기 시간. 질문 목록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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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6. 당신의 2019년 7월과 당신의 2021년 7월을 얘기해 주세요. 1년 전 - 지금 - 1년 후, 당신의 삶 어떤 게 그대로고, 어떤 게 새롭고, 어떤 게 변화하나요?

 

- 1년 전

 

되돌아보니 딱 작년 7월이 내가 사내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고통받았던 시기다. 새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놓고 팀 내 전문가인 나와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우리 팀과 엮여서 숟가락 하나 얹고 세력 확장을 해보겠다는 팀 밖 전문가 집단(내 옛날 팀) 매니저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나는 원래 그 팀이 주도권을 잡을 것을 전제로 팀 내 전문가로서 일종의 상담역으로 논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매니저가 도통 내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고 내 의견을 마치 내가 자기를 자기 팀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감정싸움이 시작되었고 결국 주도권 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어디까지나 위에서 나를 상담역으로 붙였기 때문에 이 팀이 제대로 된 기획안을 내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 하고 있으면 내 책임이기도 해서 이런 부분은 생각해봤냐 우리 제품은 우리 회사 다른 제품들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것도 고려해야 한다 등등 위에서 나올 법한 질문들을 미리 제시하고 준비시키려고 했던 것뿐인데. 이 사람은 내 의견을 무시하는 걸 넘어서 나라는 존재를 무시하는 언행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까지 반복하고 심지어 나를 빼고 우리 팀 리드들과 회의를 잡으려 하는 등 도대체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 우리 팀 리드들이 나한테 먼저 조정하라고 나를 보낸 건데 나를 빼면 어쩌라고. 우리 팀 리드들한테 어떻게 깨질지 눈에 훤하게 보이는 데다 무엇보다 우리 팀 리드들의 시간낭비라고. 결국 나는 이 팀이 망하면 나도 망하고 어떻게 내가 도와줘서 이 팀이 잘해도 팀 매니저가 나한테 이렇게 적대적이니 당연히 내 도움을 인정 안 할 거라 공은 빼앗기는, 어느 쪽이든 나는 망할 뿐인 상황에 빠졌버렸다. 결국 타개책으로 이 팀의 기획안에 대한 대항마로 나만의 기획안을 만들었더랬다. 원래 사내 다른 팀에서 아웃 소싱하려고 한 걸 인하우스로 해결할 경우를 상정한 기획안. 결과적으로 채택된 건 내 기획안이었다. 일단 상대는 기획안이라 할 만한 기획안이 없었거든. 본인들이 사내 다른 제품을 대상으로 제공해왔던 일반적인 메뉴를 보여줬을 뿐이지 우리 팀 제품에 맞는 메뉴가 아니니 우리 팀 리드들 입장에서는 'So what?'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원래 그 팀에 있어봐서 너네 뭐하는지도 잘 알고, 그대로는 우리 제품에 통용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입 아프게 말했잖아. 두 달 넘게 고통받았던 일이라 할 말이 많아서 길어지는데 그때 정말 힘들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상대가 나를 무시한 게 내 의견이 타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상대보다 어리고 직급도 낮고 여자라서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내 의견과 똑같은 의견을 남자고 상대랑 비슷한 직급, 연령대인 내 간접 보고 라인(dotted line)의  매니저 R이 이야기했을 때 완전히 다른 태도였거든. 전달 방식의 문제가 아니냐고? 내가 완전 무시당하는 걸 목격했던 R도 내가 의견을 개진한 방식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걸 확인해줬다. 회사 생활 8년 동안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간 내가 정말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지만, 무경험 무방비인 상황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그저 분할 뿐이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걸 채우려고 노력하겠는데 내 성별이나 나이는 내 맘대로 못 바꾸거든. 어쨌든 이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해서 주도권을 잡고 1년여간 프로젝트를 리드한 끝에 올해 7월에 론칭을 했다. 론칭 전 최종 보고 때 우리 팀 VP한테 이 프로젝트는 너희가 잘 알아서 하고 있는 걸 쭉 봐와서 이 프로젝트만큼은 걱정 안 했다고, 내게는 최고의 칭찬을 들었고 론칭도 때맞춰서 무사히 마쳤다. (어이 A, 보고 있냐? 맛이 어떠냐ㅋㅋㅋㅋㅋ) 

 

- 지금 

 

위에 썼다시피 작년의 삽질을 거쳐 많은 것을 배우고 예상치도 못했던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산 속에서 도 닦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일취월장했다고 밖엔. 예전보다 당면하는 문제를 좀 더 수월하게 해결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보는 눈, 그 문제에 얽혀있는 사람들을 파악하는 눈이 전보다 밝아져서인 것 같다. 그리고 자가격리 중 남아도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말하지만 취미가 늘어서 이제 꽤 바쁨) 자기성찰의 시간이 늘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원하는 게 뭔지도 더 분명해졌고.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인간은 강하다 :) 

 

- 1년 후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어서 예측도 못하겠다. 제대로 회사로 출근이나 하고 있을까. 여전히 집에 있다면 오타쿠력이 더 강해져 있을 거 같고 독거노인의 길에 1년 치 더 가까워졌겠지. 해금되었다면 열심히 공연 보러 다니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데이트하고 그러지 않을까. 그때는 짝꿍이 옆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