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창고

산보 마스터

퇴근토끼 2021. 1. 4. 17:46

작년 3월 처음 샌프란에 자택 대기명령이 내려졌을 때 첫 3개월 동안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밖에 외출을 안 하고도  멀쩡하게 잘 지낸 전력이 있어 세계 집순이/집돌이 선수권 대회가 있다면 유력 우승 후보라고 자부하는 내가 새해 들어 본성에 어긋나는 목표를 세웠다. 주 3회 산보. 장보기도 배달로 대신하고 필요 최소한의 운동도 집에서 소화하는 편이어서 딱히 집에 있다고 불편하다거나 손해 보는 느낌도 아니었고 오히려 안전하다는 느낌에 안심이 되었는데 해가 바뀌니 괜한 변덕이 생겼다. 적어도 지금까지 집에 있었던 것만큼은 더 재택근무가 이어질 것 같으니 딱히 볼 일이 없어도 나가서 콧구멍에 바람 쐬고 돌아오는 정도의 변화를 주는 것도 괜찮겠지. 생각 난 김에 새해 첫날부터 바로 나갔고, 어제 거르고, 오늘 다시 나갔다. 

 

집 근처 공원으로 가는 길이 다행히(!) 내리막이라 발걸음이 가볍다. 새로 산 워킹슈즈도 세상에 가볍고, 라이트 그레이에 핑크 하이라이트가 들어간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그야말로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하는 어린애 같은 기분이 든다. 같은 듯 다르게 생긴 주택과 골목을 지나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차가 여전히 바쁘게 오가는 큰길을 양 옆에 두고 펼쳐진 숲길이 해리포터 기차역 마냥 비현실적이라 묘하게 가슴이 뛴다. 나무가 우거진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자면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전해지는 풀내음이 기분 좋다. 오늘은 샌프란 특유의 살짝 안개 낀 날씨라 촉촉한 공기 속에 풀내음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커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사회적 거리두기는 충분히 가능한 정도지만 그래도 집순이에게는 풀내음을 뱃속 깊이 들이마시기에는 공원의 인구밀도가 높게 느껴져서 개인적 안전거리(4~5미터 정도)를 확보하기 위해 산책로를 같은 방향으로 뺑뺑이 도는 게 아니라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옆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으면 그리로 흘러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알 수 없는 곡선을 꼬불꼬불 그리면서 걷는다. 그러면서도 약간 거리를 두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30분쯤 걷다 보면 몸이 꽤 따뜻해져 오고 살짝 땀이 날까 말까 하는 때에 출구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이지만 이미 데워진 몸이라 가뿐하게 오른다. 오는 길에 선명한 진분홍빛 꽃이 담을 타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집을 지나면서 꽃구경을 즐기는 건 보너스. 

 

작년에도 실은 두어번 정기적으로 산보 나가는 걸 시도했다가 마스크 안 쓰고 조깅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지레 겁먹거나 쌀쌀해진 날씨를 핑계로 그만뒀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마스크 안 쓴 사람들이야 내가 피해 가면 되는 거고 (꼬부랑 코스 신공) 1월 초에도 10도 안팎인 샌프란 날씨를 춥다고 산보 못하겠다고 하는 건 그야말로 핑계일 뿐 오히려 사시사철 산보하기에는 최적의 날씨라. 어쨌든 시작이 반이라고, 이틀 출석도장 찍고 의기양양해하는 중이다. 휴대폰 없이 자켓 주머니에 집 열쇠만 달랑 넣고 (물론 왼손 손목에는 Fitbit이 :) 나가는데서 해방감이 드는 건 역시 집순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욕구가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공원 산보를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따뜻한 집 공기가 나를 맞아주는 느낌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역시 내겐 집이 최고다 싶기도 하다. 집 떠나봐야 집 좋은 줄 안다의 미니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