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매너

우리 팀에서는 매년 한 해의 제품 로드맵을 정하고, 분기별로 보다 세분화된 로드맵을 만든다. 해당 분기에 연간 로드맵에 비추어 어느 정도 진척을 이루어냈는지, 그에 따라 다음 분기 로드맵은 어떻게 변하는지, 예상되는 리스크는 무엇이고 그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지 등을 분기별로 모여 각 영역별로 담당자가 발표를 하고, 높으신 분들의 승인 내지는 피드백을 받는 로드맵 리뷰 회의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게 내 업무 중 하나이다. 참석자가 우리 팀 VP 이하 높으신 분들을 포함해 40~50명은 너끈히 넘어가는 데다 실 참석자 수는 별론으로 초대장 자체가 100명 가까이에 나가는 꽤 규모가 큰 회의인 데다 기본 하루 반나절, 연일로 진행되는 회의라서 시간 분배며 일정 조정, 참석자 발표 준비 체크, 간식 등등 본 회의 진행 이외에도 소소하게 챙길 것이 많다. 4년 전 꼬꼬마로 이 팀에 들어와 처음 이 업무를 맡았을 때와 비교하면 회를 거듭하면서 상당히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긴장되는 게 사실이다. 오늘 일사분기 로드맵 리뷰를 진행하면서 작년 3월에 처음으로 전원 화상 회의로 시작한 이후, 1년 사이클을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전원 화상 회의 모드로 들어서기 이전과 이후의 내 스트레스 지수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회의실 준비나 시애틀 출장 준비가 필요 없어져서 부담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본회의 진행 중 받는 스트레스가 확 줄었다.

 

작년 3월에 처음 전원 화상 회의 모드로 들어설 때는 대규모 회의를 과연 트러블 없이 잘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어서 이것저것 더 신경을 쓰기는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회의 진행이 게임은 아니지만 일종의 비기너스 럭(Beginner's luck) 같은 기분이었달까 내가 잘해서 잘 된 것보다는 뭔가 운좋게 잘 굴러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후 오늘까지 세 번을 더 거듭하다 보니 깨달은 건 확실히 내가 잘해서 잘 된 것이 있고 (겸손도 좋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참석자의 회의 매너에 생긴 변화. 예전에는 2시간에 10분 휴식할까 말까 한 페이스로 하루에만 여러 영역을 타이트하게 커버해서 발표 중 핵심적인 질의응답, 토론만으로도 빠듯했는데 다들 어찌나 궁금한 것도 많고 할 말이 많은지 교통정리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타임 체크하는 내 '말'을 안 들어서 차임벨을 도입할 정도였는데 (그리고 웃는 얼굴이 그려진 노란 차임벨은 이 회의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 그걸로도 부족해서 제시간에 회의를 끝내도록 관리하는 것은 꽤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전원 화상 회의가 되면서 다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긴장감이 있어서인지 남들과 말하는 타이밍이 겹치지 않게 '손들기' 기능을 이용해서 발언권을 얻기까지 기다리고, 발언 내용 자체에도 보다 신중을 기하고, 시간에도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한 방에 몇십명씩 모여서 회의를 하던 시절, 남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끼어들어서 자기 할 말을 하거나 남이 이미 했던 이야기를 자기 표현으로 다시 반복하거나 제한 시간이 종료되었다고 알려도 무시하고 자기 할말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쟁점을 던지는 모습 등등이 흔하게 있었던 걸 돌이켜보면 구성원 자체는 똑같은 사람들인데 싶어 감개무량하다. 회의 매너, 우리도 하면 되네!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이 되찾은 (혹은 새로 장착한) 회의 매너 덕에 오늘 회의는 진행자로서 존중받으면서 스트레스가 거의 없이 내 역할을 즐기며 진행할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 리모트 워크의 실버라이닝. 

'회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요일의 좋은 점  (0) 2021.01.19
역지사지  (0) 2021.01.16
월요일의 좋은 점  (0) 2021.01.11
해피 프라이데이  (0) 2021.01.09
복귀 첫날  (0) 2021.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