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영주권 지문 찍으러 가는데 처음 통지를 받았을 때 기쁜 한편으로 한참 각종 범죄 뉴스에 벌벌거리고 있던 때라 다운타운에 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복잡한 심경이었다. 오죽하면 코스프레용 금발 가발을 뒤집어쓰고 갈까 하고 고민했을까. 나름 꽤 진지했는데 이게 또 아시아인 대상 범죄는 피할 수 있다고 쳐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이라 여성 대상 범죄는 못 피하거든. 게다가 목적지가 이민국. 신원 조회 때문에 지문 찍으러 가는 건데 변장하고 나타나면 참으로 기특하게 여기겠다. 상담 선생님한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 나라에서 더 살아보고 싶어서 영주권을 신청했던 건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싶다고 이건 뭐 영주권을 받는 게 맞는 건지 회의가 든다고 했더니 일 년 넘게 함께 해온 선생님이 정말이지 지금껏 본 것 중에 최고로 속상한 표정으로 나보다 더 한탄을 했었다. 어쨌든 변장 없이 평범한 나의 모습으로 페퍼 스프레이 키체인을 불끈 쥐고 리프트 타고 도어 투 도어로 다녀오는 걸로 결론을 내렸는데 며칠 사이 기분이 바뀌어서 이제는 내일 뭐 입고 나갈까 하고 눈누난나 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샌프란 사람 다 된 듯 레깅스에 파타고니아 재킷 차림으로 동네 마실 다니는 게 전부였는데 내일은 간만에 좋아하는 블레이저를 입고 다운타운에 진출할 생각을 하니 신나네. 작년에 사서 봉인 중이었던 힐도 같이 신으면 완전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하려면 역시 플랫슈즈구나 싶다. 아직 뭐 대략 그런 심경.
P.S. 그러고보니 오늘은 결산하는 날이었다. 3월 한 달은 총 2,617 단어, 9,093자를 썼다. 하루 평균 131 단어, 455자. 컨셉진 프로젝트 끝나고 내 맘대로 쓰는 생활로 돌아오니 대략 다 생존신고 글이지만 글쓰기 싫은 날이 거의 없었다. 매일 글쓰기는 하루 100자 (이상) 쓰기로 4월에도 계속!
바로바로 수거하지 않으면 택배 상자 따윈 금방 도둑맞고 마는 샌프란이지만 지난 1월 프렌치 불독 강도사건의 충격은 컸고 오늘 그에 못지않은 놀라운 걸 보고 말았다. 동네 커뮤니티 게시판에 한 주민이 방범 카메라에 잡힌 도둑의 영상을 올리면서 주변에 경고를 했는데 도난당한 건 다름이 아닌 집 앞 화단에 정성 들여 심어둔 동백꽃. 흑백 화면 속에 주변을 살펴보다 훅하고 동백나무 묘목을 뿌리째 뽑아 들고 사라지는 도둑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다. 프렌치 불독은 워낙 비싼 품종이니 되팔아 돈 좀 만진다 쳐도(?) 팔뚝 사이즈의 동백 묘목은 대체... 참 살다 살다 꽃 도둑을 다 본다. 더 웃긴 건 댓글에 꽃 종류는 달라도 나도 당했다는 사람이 여럿이다. 택배 상자 도둑이며 핼러윈 장식 도둑이며 개 도둑이며 꽃 도둑이며, 너네 정말 나빠.
밤이 되어 어둠이 깔리면 청각이 더 예민해진다. 집안에서는 째깍거리는 벽시계 소리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고, 윗집에 또 손님이 온 건지 꺄르륵 대는 소리도 더 육중하게 웅웅 댄다. 창밖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거의 매일같이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집 앞 차도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오늘도 어김없다. 언덕길이라 경사진 아스팔트 위를 긁으면서 내려가는 그 소리는 차가 오가는 소리 속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자랑하며 고막을 때린다. 도대체 정체가 뭔지 궁금하면서도 뭔지 모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와일드한 상상의 즐거움이 있어 아직 탐정 모드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스케이트 보드 소리'가 들려올 때 자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잭 스켈링턴 풍의 저승사자가 영혼을 수거하느라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다. 코로나 사망자수가 50만명이 넘은 미국 사정, 최근 들어 고담 시티에 버금가는 분위기의 샌프란 사정이 무의식중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얼굴이 잭 스켈링턴이라는 데서부터 장르는 일반 호러라기보다는 코믹 다크 판타지에 가깝다고 할까. 이 상상을 더 펼쳤을 때 공포보다는 블랙 유머라도 좋으니 웃음이 더 섞여있었으면 좋겠다고 감상에 젖은 2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 밤. (정신차려! 네 밤만 자면 다시 3 연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