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건너온 지 2년이 좀 넘은 일본인 친구가 한 백인 슈퍼마켓 점원이 자기한테 중국어로 고맙다고 (Xie xie) 해서 놀랐다며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는지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사람들이 내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온 적이 몇 번 있다. 친구가 겪은 것처럼 비아시아계 사람이 아마도 본인이 아는 유일한 중국어(Nihao 아니면 Xiexie)를 랜덤하게 던진 경우도 있었고, 영어가 서툰 중국인이 길 찾기라든지 뭔가 도움을 요청하려고 중국어로 말을 걸어온 경우도 있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영어로 나는 한국인이라고 중국어 못한다고 답하곤 했었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일본 살 때 이웃으로 친하게 지냈던 캐나다인 T와 함께 당시 한참 유행이던 포켓몬고를 하며 에비스 주변을 산보하다 일본인 할머니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할머니가 (내가 일본인이 아닌 건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지만) 백인인 T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걸 보고 신기하게 여겼는지 T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T가 에비스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다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T가 다시 에비스에서 왔다고 하고 내 손을 이끌며 자리를 떠났다. 내가 보기에 할머니의 질문은 명백히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거라 캐나다에서 왔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마자 T가 ‘How rude!’라며 분개했다. 그때는 왜 T가 별 거 아닌 질문에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무례한 건 그런 식으로 자리를 떠난 T가 아닌가 싶었다.
이제는 T가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다. 어디서 왔냐는 질문은 ‘너는 외부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본어에서 외국인을 일컬을 때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外国人’이라고도 하지만 외국인을 얕잡아보는 표현으로 ‘外人’이라는 단어도 있다. 문자 그대로 외부인. T의 불쾌함은 아마도 겉모습만 보고 너는 우리와 다르게 생겼으니 외부인일 거야라는 그 전제에서 왔을 거다. 결국 할머니의 그 전제는 옳았지만. 일본인 친구와 내 경우, 상대의 전제는 명백히 틀렸다. 그들의 의도가 뭐였든 결과적으로 NG.
사회화를 통해 고정관념이 생겨나고, 인지판단의 효율을 위해 개개인이 고정관념에 기대다 보면 편견과 차별이 생겨나게 된다. 내가 고정관념에 비추어 남을 판단하는 것, 남이 고정관념에 비추어 나를 판단하는 것. 이 둘에는 꽤 감정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후자에 거부감이 든다면 전자에도 유의하자.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까지 갈 것도 없이 황금률로. 지레짐작하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