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도쿄에서 회사 다니던 시절 친구인 N에게 오랜만에 이메일로 안부를 전했다. SNS는 이미 오랜 기간 방치 중이었어서 이메일을 보내기 전에 예습이랄까 그간 쌓인 소식을 따라잡는다는 의미에서 보충학습이랄까 N의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니 갓난아기 때 만났던 첫 딸은 이제 숙녀가 다 되었고, 임신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던 둘째도 작년 말에 태어나서 이제 돌이 다 되었다. 

 

나보다 어리지만 회사 선배인 N과 나의 관계는 사실 처음에는 껄끄러웠다.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 손꼽을 정도로 딱 부러지고 똘똘한 N에게 입사 당시의 맹한 내 모습은 꽤 답답하게 보였던 것 같다. 나는 나대로 어린 선배가 무서웠다. 서로 알아가면서 친해지는데 1년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작은 결혼식을 하는 일본에서 하객 스무 명 남짓의 더 작은 결혼식을 계획했던 N에게 초대를 받고, 더 나아가 N이 국제결혼이라 영어와 일본어 2개 국어로 진행될 본인 결혼식의 공동 사회를 내게 부탁해왔을 때의 감격은 남달랐다. 결혼식 사회 같은 것 해본 적도 없고 영어도 일본어도 다 모국어가 아니라 겁은 나지만, 하고 말고! 식이 열린 N의 고향인 후쿠오카로 날아가 N의 소중한 순간을 함께 했던 것은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N은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런던으로 거주를 옮기면서 퇴사했다. 그래도 여전히 연락은 주고받아서 첫 아이가 태어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 런던에 놀러 가서 아기 유모차를 끌고 공원으로 산책도 나가고, 아이를 남편한테 맡기고 여자 둘이서만 켄싱턴 가든 오랑제리에서 애프터눈 티도 즐기고 런던 시내 구경을 했던 추억도 있다. 그게 벌써 5년 전! 세월 참 빠르다. 

 

일 욕심이 많았던 N이라 첫 아이 출산 휴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런던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의외였다. 어쨌든 회사일을 딱 부러지게 하던 N은 엄마 노릇도 딱 부러지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영어권에 살면서 아이들 일본어 교육을 위해 그림책도 손수 만들고, 건강한 재료로 과자를 만들어서 먹이는 모습 등등, 역시 N답다 싶다. 내 제멋대로인 상상이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과 N이 있는 곳이 사실은 서로 뒤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든다. 도쿄에서 회사 다닐 때 농담 반 진단 반으로 고토부키 타이샤(寿退社: 결혼하면서 퇴사하는 것)가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나는 미국 본사로 넘어와 싱글로 회사 생활을 만끽 중이고,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해서 나중에 최연소 디렉터를 찍는 게 아닐까 싶었던 N은 육아 생활을 만끽 중이다. N의 예쁜 가족사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따뜻해지고 그리운 느낌이 드는 한편으로 이 나이쯤 되면 나도 당연히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왠지 아프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게 내가 정말 원하는 건지 아닌 건지도 애매해졌는데 그저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그 느낌. N은 어떨까. 

 

그런 약간은 복잡한 심경으로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 화상통화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N과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기대 반 걱정 반. 어쨌든 정말 반가울 거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N이 런던으로 가기 전에 내게 주고 간 큰 인형이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데 크리스마스라고 산타 모자를 쓰고 앉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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