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 그리드

어제 시애틀에 불어닥친 폭풍우로 일부 지역에 대규모 정전 사태가 벌어졌는데 우리 매니저도 피해를 당했다. 어제 아침 본인이 주요 패널이고 발표도 해야 하는 로드맵 회의를 앞두고 정전 때문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매니저가 문자 메시지로 연락해왔을 때 심지어 폰 배터리도 거의 다 되었다고 해서 듣는 내가 다 속이 탔다. 복구에 시간이 꽤 걸려서 토요일에나 복구가 될지 아닐지 하는 상황이라서 결국 오늘 오후에 네 식구가 함께 임시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마침 오늘 매니저와 1:1이 있어서 장장 36시간이 넘는 정전을 경험한 후 호텔방 침대에 기대어 화상회의에 참석한 매니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이틀간의 예상치 못한 수난에서 오는 피로감과 드디어 전기와 인터넷이 있는 공간으로 복귀한 것에서 오는 안도감이 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지난 2월 우리집에 이사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원인이 뭐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동네에 정전이 있었다. 정전이라니 도쿄 생활 7년 동안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었고, 정전 경험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어렸을 때뿐이라 토요일 저녁 8시 반쯤 갑자기 팟하고 TV와 소파 양옆의 스탠드가 꺼지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멈추었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다. 폰 배터리도 32% 남아있는 상태라서 어찌나 더 긴장되던지. 나쁜 기억력에 자부심이 있는데 어째 이 숫자를 그대로 기억할 정도로 샌프란 첫 정전 경험은 임팩트가 있었다. 일단 깜깜하니까 침대 맡의 향초에 불을 붙이고 침대에 앉아서 정전 사태에 대한 검색을 시작했다. PG&E (전기회사) 사이트의 정전 관련 정보 페이지를 보니 우리 동네 정전이 보고 되었고 복구 중이라고 되어있는데 언제까지 복구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얼마 안 남은 배터리가 걱정되어서 문자 메시지로 업데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전화번호를 등록하고, 엄마한테 정전 중이고 배터리가 얼마 안 남아서 연락이 한동안 안 될지도 모른다고 연락해두고, 계속 폰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폰에서 손을 떼었다. 촛불 하나에 의지한 어둠 속에서 홀로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할지, 냉장고 속 음식은 괜찮을지 걱정하기 시작했는데 미묘하게 움직이는 향초의 불꽃을 바라보는 것과 달콤한 향초의 향(딥티크 베이)이 주는 안정 효과 같은 것이 있어서 얼마지 않아 이러고 앉아서 걱정해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하고 침대맡 테이블의 크레마(이북 리더)를 손에 들고 당시 읽고 있던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아라비안 나이트라니, 지금 생각해도 절묘하다. 처음에는 희망찬 마이홈 생활 첫 달부터 정전을 겪는 게 짜증스러웠지만 평소와 다른 토요일 밤이 어떤 의미로는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데 한 시간쯤 지나 전기가 돌아왔다. 전기가 돌아오자마자 나는 어둠 속의 아라비안 나이트의 여운을 즐기는 것은 뒷전으로 바로 다시 폰을 충전하고 TV를 켰다. 

 

36시간 정전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일단 폰과 이북 리더는 항상 충전해둘 것, 그리고 향초를 항상 구비해둘 것. 뭐 그럼 어둠 속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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