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사람 필터

사비를 들여 오늘부터 6주간 일주일에 한 번 진행되는 커뮤니케이션 관련 온라인 워크숍에 참가하게 되었다. 즉흥극(improv)의 형식을 빌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을 연습하는 워크숍인데 배움의 목적상 대개 곤란한 설정으로 연습할 거라고 한다. 오늘은 첫 시간이다 보니 강사와 참가자가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워크숍 참가 이유를 공유하면서 낯을 익히고 몸풀기로 가볍게 두 개의 1:1 즉흥극을 연습했는데 강사 지명으로 첫 번째 즉흥극에 내가 당첨되었다. 설정은 내 상대가 ‘상사’로 ‘나름 승승장구하고 있고 본인이 부하직원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데 실은 부하직원 말도 잘 안 듣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 내가 ‘부하 직원’으로 ‘일 잘하고 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사람’이었다. 강사가 내 상대역에게만 내가 모르는 추가 설정을 전달하고, 즉흥극이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그 상황인즉슨, 상사가 새 프로젝트를 맡기려고 나를 불렀는데 내 이름을 계속 엉뚱하게 잘못 부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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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요즘 어떻게 지내, 야근곰? 이번에 출시한 제품 관련 시장 반응 분석에 관한 새 프로젝트 때문에 불렀어.
퇴근토끼: 덕분에 잘 지냅니다. 저 퇴근토끼고요. (퇴근토끼 here :) 아 새 프로젝트군요.
상사: 그래 잘 지낸다니 다행이군, 야근곰. 이번 제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지? 시장 반응 분석 계획을 세우고 관련팀과 이번 주 중으로 논의해야 하니 회의를 잡아줘.
퇴근토끼: 이 프로젝트는 제 스킬과 부합하는 것이라 저에게 맡겨주셔서 감사한데 ‘야근곰'이 아니라 저 ‘퇴근토끼’를 찾으신 게 맞나요?
상사: 그래 그동안의 성과를 봐서도 이번 프로젝트는 야근곰 자네에게 맡겨야겠다고 전부터 생각했지.
퇴근토끼: 감사합니다. 그런데 야근곰은 제 옆자리에 앉는 동료고 저는 퇴근토끼라서 야근곰이라고 부르시는 게 불편하네요. 말씀하신 대로 진행은 가능합니다만…
상사: 그래 고마워 야근곰. 이번 주는 이 프로젝트를 최우선으로 진행하도록 해.
퇴근토끼: 네 그러니까 저는 퇴근토끼고, 제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있는 건 이해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해서 이메일로 업데이트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메일 보시면 제 이름 퇴근토끼가 있으니 스펠링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테니 참고해주세요.

(여기서 강사가 내 상대역에게 신호)
상사: 하핫, 이름을 잘못 불렀군. 미안하네.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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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 첫 타자로 나선 데다 말도 안 되게 상대의 귓구멍이 막힌 상황이라 (이렇게 한글로 옮겨놓으면 느낌이 다를지 모르지만) 폭소와 함께 박수를 받았다. 강사 총평은 상대를 비난하는 일 없이 공손하게 창의적인 방식으로 자기 할 말을 한 게 좋았다고. 이 즉흥극을 관찰한 다른 참가자로부터도 어떻게 끝까지 폭발하지 않고 이렇게 대응했냐고 칭찬 겸 질문을 받았는데, 실은 마지막 턴에서 공손함의 범위 내에서는 쓸 수단을 다 썼고, 나름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gressiveness)을 표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 번 더 턴이 돌아왔다면 다른 양상으로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다.

 

끝나고 나서 피드백을 곱씹다보니 실은 내가 오늘 즉흥극에서 연기한 캐릭터 설정 ‘일 잘하고 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사람’에서 ‘일 잘하고'는 별론으로 ‘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필터라는 걸 깨달았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요약 정리해줬는데도 문제의 요점을 파악 못하고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 내게는 우선순위가 한참 낮고 불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안 하고 있는 일을 자기 편의 상 계속 나에게 밀어붙이는 사람, 이메일에 리포트 링크 다 추가해서 보냈는데 그걸 못 찾고 이런저런 데이터를 수합한 리포트는 없냐고 바로 그 이메일에 회신해서 물어보는 사람 등등… 기본적으로 남이 쓴 글을 안 읽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들한테도 성질 죽이고 조곤조곤 회신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쓰고 보니 오늘의 상황극이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극단적인 것도 아니구만!) 성질 죽이기의 역사를 반추해보면 사회초년생일 때는 단순히 미움받지 않고, 사랑받고 싶어서 ‘공손한 사람 필터’를 적용했던 것 같다. 똥오줌 가릴 정도가 되고부터는 장기적인 관계 구축의 차원에서 그랬다. 요즘은 인간관계 관리의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것보다 어떻게 대응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이 더 높은지에 초점을 맞춰서 판단하고 결과적으로 필터를 적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저 순둥순둥 하기만 한 대응이 아니라 할 말은 한다. 앗 그리고 방금 깨달았다. 나와 대척점에 서있다고 생각했던 왕보스가 왜 나와 본인이 닮았다고 생각하는지 알 것도 같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굴리는 거, 이거인 것 같다. 아무튼 내 일부인 공손한 사람 필터를 자각하게 된 하루. 오늘 하루 필터를 많이 써서인지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저녁 먹고 나서 아이스크림 파인트 반 통을 흡입하고, 홈 가라오케 1시간을 꽉꽉 채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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