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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집에 전화할 때는 엄마 카톡으로 전화를 걸어 한참 수다를 떨다 “아빠 있어? 아빠 좀 바꿔줘.”하고 엄마 폰을 넘겨받은 아빠와 통화를 하곤 한다. 나는 생김새나 타고난 성격은 아빠를 많이 닮았는데 어째 아빠 딸이 아니라 엄마 딸이 되었다. 은퇴 후에도 공사다망한 우리 아빠는 회사 다니는 동안 학업을 병행하며 석박사를 딴 데다 우리 엄마 말마따나 대한민국 사람 절반이 친구라 귀가가 늦는 날이 대부분이어서 철들기 전에 아빠를 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었고 철들고 나서는 나도 집을 떠나서 결국 우리는 삼십 년이 넘도록 아직 친해지는 중이다.

 

아빠와의 통화는 늘 같은 패턴이다. 서로 잘 지내냐고 묻고, 아빠가 내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운동도 하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고 한다. 종종 아빠가 넷플릭스의 영화나 다큐를 추천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3분도 이어지지 않고, 서로 잘 지내라고 다시 통화하자고 하고 마무리된다.

 

늘 온 가족 따로따로 통화하다가 2주 전부터 다 같이 얼굴 보며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디어, 집 떠난 지 11년 만에) 들어서 주말에 화상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시작한 시기가 마침 미 대선 직후라 정치 외교에 관심이 많은 우리 아빠가 거기 분위기는 어떠냐부터 시작해서 한국에 보도된 내용들이며 아빠가 예상하는 향후 방향까지 할 말이 많았다. 나는 나대로 카오스의 한복판에서 할 말이 많아서 부녀간에 열띤 대화를 나눴다. 몇 분인지 안 재봐도 분명 신기록이다. 정치라는 건 딴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평생 정치에 관심이 없다가 이제야 정치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되어 예상치 못했던 아빠와의 접점이 생겼다. 새로 당면한 문제는 아빠와 내가 서 있는 곳이 서로 반대 방향이라는 것. 현 정권이 쏟아내 온 거짓부렁이 바다 건너에서는 더 그럴싸하게 들리는 건지, 아니 하긴 광활한 미국 대륙에서도 절반이 믿는 이야기니까 어쩔 수 없나. 아빠가 하는 말에 자꾸만 ‘아니 그게 아니라'하고 아는 척 잘난 척하는 내가 있었다.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 팻(브래들리 쿠퍼)의 아빠(로버트 드니로)가 아들의 침대맡에 앉아 내가 늘 같이 미식축구 중계를 보자고 하는 건 시합에 이기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미식축구 팬이자 스포츠 도박사인 아빠에게는 아들이 행운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로, 아들이랑 같이 봐야 응원팀이 이긴다는 징크스가 있다) 너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서라고, 네가 괜찮은지 알고 싶어서라고 (아들이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가퇴원했다) 힘들게 고백하는 장면. 화면 속의 아빠도 울컥 눈시울이 촉촉해졌고, 화면 밖 나도 울컥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아빠는 아들과 어떻게 대화해야할지 몰라 같이 미식축구를 보자고 할 따름이었다. 익숙한 이 느낌. 우리 아빠다.

 

오늘도 엄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를 걸었다가 옆에 있던 아빠가 내 전화냐고 엄마한테 묻는 소리가 들려서 아빠 바꿔달라고 하고 아빠랑 통화를 했다. 평소 패턴, 요즘은 어떠냐는 것. 미국에서 코로나 감염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서 코로나라고 직접 물어보지는 않아도 그 이야기다. 여전히 잡힐 기미가 안 보이고 캘리포니아도 규제 수준이 확 올라갔다고 하니까 아빠가 ‘날씨가 추워지면 없어질까 했는데' 그런다. 여기서 다시 ‘아니 그게 아니라'가 치밀어 올라 날씨가 추워지면이 아니라 따뜻해지면 잦아들까 했던 거고 추워지면 다시 기승을 부릴 것은 이미 예상했던 거라고 굳이 고쳐주는 딸내미가 여기 있다. 네트워크 연결이 안 좋아서 도중에 끊겼는데 아빠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디까지 들었든지 무슨 상관이냐. 딸내미가 또 아니라고 하고 이야기도 제대로 못 했다. 뒤늦게 아차 싶어 연결이 안 좋아서 끊겼다고 식사 맛있게 하라고 다음에 또 통화하자고 아빠한테 카톡을 보냈는데 여전히 뒷맛이 안 좋다. 왜 항상 옳아야 하냐. 아빠가 잘못 알고 있는 거든 말실수한 거든 뭐든 그 대화 내용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마도 우리 아빠 버전의 같이 미식축구 중계를 보자는 이야기일 건데. 괜찮니 우리 딸.

 

‘아니 그게 아니라'가 치밀어 오를 때 ‘응 나 괜찮아'하고 자동변환 시키는 기능을 탑재하고픈 버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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