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사람과 남겨지는 사람 중 누가 더 힘들까'의 회사원 버전 자매품으로 ‘병목 현상으로 막는 사람과 막힌 사람 중 누가 더 힘들까’ 그리고 ‘어려운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과 납득이 안 가는 결정에 따라야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힘들까'를 생각하는, 질풍노도의 한 주를 마치는 금요일 밤이다.
내게 부족함 없이 ‘AFGO!’를 선사한 이 프로젝트에서 나는 프로젝트 리드이지만 내내 협력 부서와의 관계에서 ‘막힌 사람'이었다. 협력 부서의 연락책인 R이 오늘 회의를 시작할 때 ‘이거 말하면 너 아마 날 미워할 거야'라며 말문을 열었다.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거였다. R이 처음부터 심각하게 말하니까 프로젝트를 또다시 다 뒤엎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면 됐다.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 그런 건 당연히 허용범위 내다. 엊그제의 AFGO로 나는 너네 팀(오늘부터 못난이팀이라는 애칭을 정식으로 붙여줬다)에 대한 신뢰가 이제 바닥이거든. 그나마 얇게 남아있던 것도 다 깎아 먹었어. 일본어로 やるやる詐欺 (직역하면 ‘할게 할게 사기'), 그러니까 말로는 맨날 한다고 하는데 결과로 보여준 적이 없어서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을 거거든. 어쨌든 실제로 문제가 생겼어도 R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거다. 문제 상황이 미운거지. 나와의 관계에서 R은 항상 막는 사람이지만, R 역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막힌 사람이라는 걸 알고, R을 막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또 막혀있는 연쇄 관계이겠지. 그 끝에 누군가 사람이 있을지 아니면 구조적, 기술적 문제가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다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니까 누군가 악의적으로 나를 엿 먹이려는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 이상 미워할 일은 없다. 그저 오늘은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R이 평소보다 더 안쓰러웠다. 막는 사람은 막는 사람대로 막힌 사람 대하기가 참 어렵겠구나.
마지막 순간에 그대로 가도 괜찮을지 판단할 데이터가 부족하니 일단 미루자는 결정을 내린 건 프로덕트 매니저 R2(어째 오늘은 등장인물이 다 R이네)였다. 협력 부서와의 의사 결정 회의 전 내부 회의에서 나는 기존에 보유한 데이터를 근거로 그대로 가자고 주장했고, 협력 부서와의 회의에서도 흐름을 바꾸려 딴지를 걸었지만 협력 부서의 공약에 마음이 바뀐 R2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내게는 그간의 경험 상 空約으로 보이는 게 데이터 부족에 이미 마음이 쓰인 그에게는 公約이었나 보다. 이미 내려진 결정이니 최선을 다해 새로운 방향으로 달려가기는 하지만 납득이 가는 결정은 아니기에 힘들다. 결정권자는 아니어도 프로젝트를 리드해온 입장에서 마감 하루 전에 다 뒤엎는 결정을 관계자들에게 통보하고 새로운 실행 방안을 모색하여 다시 진행하는 건 내 몫이라 어깨가 무겁고, 그간 쌓아온 신뢰 관계가 이 손바닥 뒤집기로 한 번에 날아가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첫 방향성을 제시하고 공격적인 타임라인을 원했던 것은 R2였다. 공격적인 타임라인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담당 프로젝트니 나는 전력으로 달릴 뿐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R2가 플러그를 뽑았다. 그래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는 생각은 안 든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지난 1년 남짓 함께 일하면서 엄청 머리가 좋다는 것, 무서운 추진력을 가진 결과 주의자라는 것 정도는 파악했지만 도대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 그는 지금 어떤 심경일지 궁금하다. 너도 힘드냐?
주절주절 길게도 썼지만 결국 질문이 ‘병목 현상으로 막는 사람과 막힌 사람 중 누가 더 힘들까’이든 ‘어려운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과 납득이 안 가는 결정에 따라야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힘들까'이든 답은 ‘내가 제일 힘들다.’ 나는 내가 제일 힘들고, 너는 네가 제일 힘들고, 그러니까 굳이 힘든 것에 서열을 두지도 말고 그냥 서로서로 ‘너도 힘드냐? 짜식’하고 나는 내 할 일, 너는 네 할 일 하면서 계속 나아가야지 어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