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는 12월 중순부터 휴가 모드라 빠르게는 다음 주부터, 대부분은 크리스마스가 낀 그 다음 주부터 사람들이 사라질 예정이다. 12월은 결국 31일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정상 업무가 돌아가는 건 월초 10일 남짓. 11월 말 추수감사절 주간부터 이미 한 해가 끝난 것 같은 분위기가 시작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바쁘다.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고 이것저것 끝내야 하니까.
12월에 들어서면 악착같이 연내에 끝낼 것과 포기하고 얌전히 내년으로 넘길 것을 선택하고 행동에 옮기는 게 필요한데 어째 돌아가는 게 취사선택이라는 게 없는 분위기다. 코로나 때문에 예년보다는 널럴하게 연말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했던 안일한 기대는 처절하게 배신당했다. 회의 시작 전 'How are you?'라는 인사에 통상 'Good. How are you?'하고 인사 아닌 인사를 하고 넘어가는데 요즘에는 솔직하게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고 말하고 넌 어떠냐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도 그렇다고 이번 연말에 이렇게까지 바쁠 줄은 몰랐다고 그런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구나.
이번 주에 분기당 한 번 열리는 팀 전체 회의에서 올 한 해 우리팀이 성취한 것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90분 회의 중에 거의 1/3 가량을 그 이야기를 했는데 이 와중에 많이도 성취했다는 게 자랑스러운 한편으로 이렇게 뭘 많이 하려고 했으니 다들 번아웃으로 고생했지 싶은 거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전사적인 메시지가 이 상황이 마라톤이라는 걸 잊지 말고 각자 자기 자신을 잘 챙기면서 우선순위에 신경 쓰자는 거였고, 우리 팀 리더십의 메시지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평소보다 우선순위를 더 열심히 세우기는 세웠는데 위에 꺼 마치면 끝없는 목록을 계속 헤쳐내려 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심지어 코로나와 재택 상황 때문에 새로 생긴 일도 있었다. 어쩌라고.
리서치팀 매니저 G와 회의 시작 전 인사를 나누다 연말에 끝내야할 것이 너무나 많아서 느끼는 압박에 대해 같이 한탄하는데 G가 바로 전 회의에서 만난 프로덕트팀 디렉터 M 역시 그런 압박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 했다. 디렉터급이 그렇게 느끼는 건 그 압박은 그 위에서부터 온다는 거고, 디렉터급이 그렇게 느끼면 그 압박은 당연히 그 밑에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거니 G나 내가 이렇게 빨대 제대로 꽂혀서 쪽쪽 단물 빨리는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한 거지.
이번 주에 있었던 사내 강연에서 한 높으신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우선순위를 세우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어디엔가 선을 긋고 그 아래쪽은 잘라버려야 한다고. 옳으신 말씀. 다만 올해는 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