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하다가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할 것 같은 문신. 만화책을 보는데 문신한 캐릭터가 나와서 작년 이맘때쯤 한동안 문신을 할까 고민했던 게 생각이 났다. 시술 관련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드는 타투 아티스트의 예약이 이미 꽉 차있어서 언제 새로 예약을 받을지 모른다는 것에, 문신하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에, 그리고 역시 아픈 것은 싫다는 꽤 본질적인 부분에서 짜게 식어서 없던 일이 되었다.
어렸을 땐 문신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되었는데, 문신이 멋지다고 처음 느꼈던 건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 문신. 이건 뭐 드라마 전개상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실용적인 문신이라는 게 멋지다고 느낀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인데 어쨌든 그걸 계기로 '도통 이해가 안 된다'에서 '할 수도 있지'로 넘어갔던 것 같다. 일본에 살 때는 주변에 문신한 사람이 없었고 문신이 있으면 온천에 못 들어간다는 것 (한 통계에 의하면 문신이 있을 경우 입욕을 거절한다는 시설이 56%: 이유는 주로 풍기, 위생상의 문제 59%) 때문에 문신은 나랑 상관없는 TV 속의 이야기였는데 샌프란으로 넘어오니 주변에 문신한 사람이, 그것도 양팔 가득히 문신을 넣은 사람들도 꽤 된다. 샌프란에 와서 새 팀에 들어간 초창기에 내 사수 격이었던 팀 동료가 오른쪽 팔뚝 안쪽에 기하학적인 형태의 문신을 하고 있었는데 의외라고 느껴져서 문신을 언제 했냐 왜 했냐고 물어봤었다.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했다면서 할 수 있으니까 했다는 거다. 그 'because I can'이라는 답변이 평소에 무덤덤하고 쿨한 성격인 그와 너무 맞아떨어져서 나도 모르게 아~하고 납득해버렸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했어~라는 그 말이 너무 멋지게 들려서 나도 언젠가 써먹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작년 이맘때 마음이 동했던 것도 아마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작년 여름, 회사에서 힘든 일을 겪으면서 프로로서의 내 정체성에 혼란이 왔고, 그 과정에서 자아 찾기를 하면서 내가 나 자신을 속박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깨닫고,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에서, 문신은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그런 상징이었던 것 같다.
이제와서는 넣지도 않을 문신이지만 그래도 넣는다면 어디다 넣을까 무슨 문신을 넣을까 상상하는 게 꽤 재미있다. 작년 이맘때는 한참 요가 강사 수련 중이어서 요가의 옴(om)이나 연꽃 무늬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가장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 나비 문양이었다. 예뻐서. 나비 문신을 한다면 워터컬러 문신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대략 이런 느낌. 문신을 넣는 위치는 요가 문신이라면 목덜미, 나비 문신이라면 오른쪽 엉덩이 위쪽, 프렌즈에서 레이첼이 문신했던 위치처럼 살짝 까면 보일 정도로.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선택지가 훌륭하다. 아무래도 좋은데, 이런 망상을 왜 하냐면 재밌으니까, 할 수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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