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돌아와 보니 수박 고르기가 마지막 포스트였다. 3년이나 자리를 비운 게 실은 열심히 수박 두드리다 기적과 같이 잘 익은 수박을 만나 연애하기 시작해서 만난 지 5개월 만에 같이 살고, 10개월 만에 약혼하고, 15개월 만에 결혼하느라 바빠서라는 사실. 좋은 일만 있었냐 하면 그새 우리에겐 한 번의 정리해고와 기나긴 구직 활동, 시어머니의 암투병 등등 힘들었던 일도 많았다. 그렇게 좋은 일, 힘든 일 함께 겪다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발견한 우리 영혼의 교집합이라 할만한 부분이 점점 더 커져간다. 나는 그의 색깔에 물들어 빌딩숲을 사랑하는 서울쥐가 어느새 야생꽃 이름도 댈 줄 알고, 버섯 따러 미역 따러 산으로 바다로 가고,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에 대한 꿈같은 것도 품게 되었다. 그는 나의 색깔에 물들어 어떤 영화배우, 어떤 영화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며 보는 무비 나이트를 즐기고, 요가도 다니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게 왜 웃긴 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사이드 조크(예를 들어 구글 번역기에 홍옥이 뭔지 돌려봤더니 Jonathan이라고 나와 눈물을 흘리며 웃었던 것)도 차곡차곡 쌓여간다. 부조리한 회사 생활에 울분이 치밀거나 지쳐도, 같이 뚝딱뚝딱 만든 저녁식사를 나누며 음식도 회사도 같이 잘근잘근 씹는 그 시간, 식탁을 정리하고 소파로 건너가 비스듬히 기대앉아 넷플릭스를 보는 그 시간, 잘 준비하고 침대로 들어가 커플일기를 쓰는 그 시간이 있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무수히 수박을 두드리던 그 시간보다 훨씬 더 길게, 둘이서 함께.
최근 사귄 친구 D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한다고 해서 공연을 보러 갔다. 한 시간 공연에서 마지막 순서로 나온 D가 가장 마지막에 수박에 관한 농담을 던졌다. 다른 친구를 통해 처음 만났던 피크닉에 대형 타파웨어 한 통 가득 수박을 싸온 친구라 이 친구 입에서 '수박'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다른 농담들도 웃겼지만 이게 분명 알짜배기다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이야기인즉슨,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수박을 고를 때 심혈을 기울여 하나하나 다 두드려보는데 손목이 아플 때까지 몇십 개를 두드려봐도 그 소리가 그 소리인 것 같고 알 수가 없어서 결국은 적당히 하나 골라 속이 썩지 않은, 맛 좋은 수박이길 빌며 사서 돌아온다는 거다. 농담과 상관없이 수박 박사의 수박 고르기 팁이라도 배울 수 있을까 싶어 기대하다 실망하기 직전에 이 친구가 예상치 못한 변화구를 던졌다. 수박 고르기나 온라인 데이팅이나 마찬가지라고.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프로필을 계속 스와이핑 해보지만 그놈이 그놈인 것 같고 얻어걸린 (*매칭 된) 남자가 속이 썩은 게 아니길 바라며 만나보는 거지. 지난번 피크닉에서 나의 온라인 데이팅 라이프에 대해 살짝 이야기했던 적이 있어서 곰돌이 같은 남자가 좋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서 공연 끝나고 나서 D가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 문자에 덧붙여 요즘의 '곰돌이 사정'이 어떤지 물어왔다. 뭐 나도 손목 뽀사질 때까지 계속 두드리고 있는 거지 뭐.
양지바른 남동향 다이닝 공간에 꾸려둔 홈오피스를 15개월 만에 철수했다. 실은 내일 하루 더 일하고 다음 주부터 오피스로 출근하니까 주말에 옮겨도 괜찮았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다 치우고 제대로 달밤에 체조했네. 철수했다고 해도 식탁 위에 두었던 모니터랑 액세서리 일체를 나의 미니 서재 공간으로 옮겼으니 완전소멸한 건 아니지만 책상 사이즈나 자연광이 비할바가 아니라서 아침에 그쪽으로 출근할 일은 없다는 게 전제다. 식탁이 이제 오롯이 식탁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키친 카운터에는 스툴이 세 개뿐이라 한 번에 손님을 두 명 이상 받기 곤란했는데 이제는 손님도 더 받을 수 있다. 새로운 시대!
그리고 오늘로 매일 쓰기 1년을 찍었다! (짝짝짝) 이제는 내킬 때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의 페이스로 편안하게 가보려고. 새로운 시대2.